넷플릭스 구독 중 - 17,000원짜리 일요일
1.
일요일 오후 두 시.
이하은은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약속이 없었고, 가야 할 곳도 없었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냉장고에는 어젯밤 시켜 먹고 남은 치킨 두 조각이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아니, 충분한지 아닌지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귀찮았다.
리모컨 대신 핸드폰을 들었다. 넷플릭스 앱을 열었다.
화면에 뜨는 문장 — 오늘 무엇을 볼까요?
하은은 잠시 그 문장을 바라봤다. 오늘 무엇을 볼까요. 마치 하은의 하루 전체를 책임져 줄 것처럼 묻는 말투였다. 실제로 반쯤은 그랬다. 넷플릭스는 그녀의 일요일을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사람과 달리.
2.
하은은 서른넷이었다.
직장은 있었다. 중소기업 마케팅팀. 월급은 평균쯤 됐다. 친구도 몇 명 있었다. 다들 결혼했거나, 결혼 준비 중이거나, 사귀는 사람이 생겼거나 — 셋 중 하나였다. 명절마다 단톡방에 올라오는 사진들. 아기 백일, 돌잔치, 상견례, 웨딩. 하은은 하트를 눌렀다. 성실하게, 빠짐없이.
그리고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연애를 안 하는 게 아니었다. 정확히는 — 시작하는 것이 너무 많이 소모됐다. 잘 보이려면 에너지가 필요했고, 맞춰주려면 시간이 필요했고, 상처받으면 회복하는 데 또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 모든 자원을 자신에게 쓰는 게 더 합리적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것처럼.
넷플릭스는 맞춰달라고 하지 않았다. 상처도 주지 않았다. 다음 화를 자동으로 재생했고, 끊고 싶으면 그냥 끄면 됐다.
이 정도면 꽤 좋은 관계 아닌가.
하은은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슬프지 않다는 사실이, 가끔 조금 슬펐다.
3.
오늘 선택한 건 범죄 스릴러 시리즈였다.
추천 알고리즘이 올려준 것이었다. 넷플릭스는 하은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잔인하지 않되 긴장감이 있는 것. 로맨스가 주가 아닌 것. 결말이 열려 있지 않은 것. 하은이 누군가에게 설명한 적 없는 취향을, 알고리즘은 조용히 학습해 있었다.
가끔 넷플릭스가 사람보다 자신을 더 잘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쾌한 생각이어야 했다. 그런데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이해받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공간. 월 17,000원으로 유지되는 이 관계는, 지난 3년간 만났던 어떤 사람보다 일관성이 있었다.
에피소드 세 편을 연달아 봤다. 창밖이 어두워졌다. 몇 시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내일은 월요일이었지만 그것도 나중 일이었다. 지금 이 소파, 이 담요, 이 화면이 전부였고 — 그 전부가 나쁘지 않았다.
치킨을 꺼내 먹었다. 식어 있었다. 그래도 맛있었다.
4.
네 번째 에피소드가 끝날 무렵,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하은은 화면을 봤다. 넷플릭스를 일시정지했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엄마."
"뭐 해? 밥은 먹었어?"
"응. 먹었어."
"혼자?"
"응."
잠깐 침묵이 흘렀다. 엄마의 침묵은 언제나 말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하은은 그 무게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데 익숙해졌다.
"요즘도 그냥 집에만 있어?"
"쉬는 날인데."
"쉬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친구들은 다들—"
"엄마, 나 좀 이따 전화할게. 지금 뭐 보는 중이야."
"알았어. 밥은 잘 챙겨 먹어."
전화가 끊겼다.
하은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돌아왔다. 아무 말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멈췄던 장면부터 다시 시작됐다.
엄마는 그렇게 못 했다. 누구도 그렇게 못 했다.
5.
밤 열한 시.
시리즈가 시즌 1을 다 소진했다. 화면에 문장이 떴다.
"시즌 2는 2026년 공개 예정입니다."
하은은 잠시 그 문장을 바라봤다.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기다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감각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오겠다고 한 사람이 오지 않던 일. 연락이 올 것 같아서 핸드폰을 계속 보던 일.
그런 기다림은 이제 하지 않았다.
대신 시즌 2를 기다리는 건 괜찮았다. 넷플릭스는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공개 예정이라고 하면 공개됐다. 사람처럼 갑자기 마음이 변하거나, 이유도 없이 차갑게 굴거나, 말과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다.
하은은 다른 시리즈를 찾기 시작했다.
추천 목록을 내리다가 손을 멈췄다. 제목 하나가 눈에 걸렸다.
"우리, 혼자이기로 했어"
다큐멘터리였다. 전 세계 1인 가구의 삶을 다룬 것 같았다. 하은은 잠깐 고민했다. 그리고 눌렀다.
화면이 시작됐다. 도쿄의 원룸, 런던의 반지하, 서울의 오피스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웃고, 혼자 잠드는 사람들. 자막이 흘렀다.
"외롭냐고요? 글쎄요. 익숙하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아요."
하은은 담요를 턱까지 끌어올렸다.
익숙하다. 맞는 말이었다. 외로움과 익숙함은 처음엔 비슷해 보이지만, 어느 시점부터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외로움은 결핍이고, 익숙함은 적응이다. 하은은 자신이 둘 중 어디쯤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 않아서 알아보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6.
자정이 넘었다.
하은은 다큐멘터리를 끄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 잠이 들기 직전, 넷플릭스가 물었다.
아직 시청 중이신가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이 저절로 꺼졌다.
방 안이 어두워졌다. 조용해졌다. 하은은 혼자였고, 따뜻했고, 배가 불렀고, 내일 회사에 가야 했고 —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것도 자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그게 좋다는 사실이, 가끔은 무서웠다.
하지만 오늘 밤은 그냥 자기로 했다.
월요일은 내일 생각하면 됐다. 시즌 2는 내년에 나온다. 엄마한테는 이따 전화하면 됐다.
지금은 그냥, 자면 됐다.
이하은은 잠들었다. 넷플릭스 구독은 다음 달 15일에 자동 결제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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