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검정고무신, 아들은 파이썬을 배운다 — 우리들의 두 세대 이야기
검정고무신과 무선 이어폰
1.
경북 의성, 1978년 여름.
이만복은 논두렁에 쪼그려 앉아 발바닥을 들여다봤다. 검정고무신 안쪽에 땀이 차서 발가락 사이가 짓물러 있었다. 열여덟 살이었다. 그 나이에 벌써 손등은 아버지처럼 거칠었고, 허리는 오십 먹은 사람처럼 뻐근했다.
"만복아, 뭐하노. 빨랑 와서 모 심어라."
어머니 목소리가 논 건너편에서 날아왔다. 그는 고무신을 다시 꿰고 일어섰다. 발목까지 차오른 논물이 생각보다 차가웠다. 한낮인데도 그늘 한 점 없는 들판에서 그는 허리를 굽혔다. 모를 한 줌 쥐고, 손목을 꺾고, 다시 허리를 세우고. 그 동작을 하루에 수천 번 반복했다.
그래도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불평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해 가을, 추수가 끝나고 마을 청년들 몇이 대구로 떠났다. 공장에 취직한다고 했다. 만복은 마지막까지 망설이다가 어머니 몰래 보따리 하나를 쌌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새벽길에 고무신 바닥이 아스팔트에 끌렸다. 딸각딸각. 그 소리가 오랫동안 귓속에 남았다.
2.
대구 성서공단, 1983년 봄.
섬유공장 직조반에서 시작해서 영업부로 올라오기까지 오 년이 걸렸다. 이만복은 구두를 처음 샀다. 비닐 재질에 가죽 무늬를 인쇄한, 국산 만 이천 원짜리였다. 신어 보니 발뒤꿈치가 까졌다. 그래도 매일 아침 걸레로 닦았다.
그해 그는 김순이를 만났다. 봉제공장 재단사였다. 그녀는 말이 없었고, 손이 빨랐고, 웃을 때 눈이 없어졌다. 만복은 처음 보는 날부터 마음을 빼앗겼지만 석 달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공장 앞 분식집에서 같은 시간에 밥만 먹었다.
고백은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를 정도로 어설펐다.
"저하고 밥 한 번 더 드시겠십니까."
순이는 웃었다. 눈이 없어졌다.
그들은 1985년에 결혼했다. 전세 보증금 삼백만 원짜리 방 한 칸. 이불 한 채, 밥솥 하나, 흑백 텔레비전 하나. 그것이 전부였다. 만복은 그게 부끄럽지 않았다.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시작은 원래 작은 것이라고, 그는 알고 있었다.
3.
1983년 서울, 어느 산부인과.
이민준이 태어났다. 그해 출생아 수는 팔십만 명을 넘겼다. 병원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아이들이 빼곡했다. 만복은 아들 얼굴을 보면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공장에서도, 군대에서도,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았는데.
"니 이름은 민준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으뜸이 되라고."
아이는 울었다. 만복은 손가락을 내밀었다. 아이가 손가락을 쥐었다. 그 작은 힘이 이상하게 세게 느껴졌다.
4.
대구, 1998년 겨울.
IMF였다. 영업부장이던 만복은 구조조정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했다. 마흔여덟이었다. 그는 사장실에 들어가 한 마디도 따지지 않았다. 그냥 서류에 도장을 찍고 나왔다.
집에 와서 순이한테도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열흘쯤 지나서야 저녁 밥상 앞에서 털어놨다.
"나 잘렸다."
순이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잠시 있다가 말했다.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당신이 아침에 넥타이 매는 손이 떨리더라고."
만복은 밥을 먹었다. 순이도 밥을 먹었다. 민준은 자기 방에서 수능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그날 저녁 식탁의 침묵은 절망이 아니었다. 만복은 그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건 서로 짐을 나눠 드는 소리였다.
이듬해 그는 퇴직금 전부를 털어 동네 조그만 신발 가게를 열었다. 간판도 없었다. 그냥 '신발'이라고만 썼다. 처음 일 년은 적자였다. 두 번째 해에 겨우 본전이 됐다. 세 번째 해에 옆 가게 자리가 비었을 때 그는 확장했다. 다시 대출을 받았다. 순이는 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만복이 옳다는 게 아니라, 만복이 멈추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5.
서울, 2009년 봄.
이민준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유통 계열사에 입사했다. 동기가 사십 명이었다. 그해 지원자는 만 이천 명이었다. 민준은 그 사실을 아버지한테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아버지는 숫자의 무게를 모를 것 같았다.
첫 월급날, 만복에게 전화했다.
"아버지, 첫 월급이에요."
"얼마 받았노."
"이백사십만 원이요."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있었다. 그러다 만복이 말했다.
"나 처음 월급이 사만 원이었다."
민준은 웃었다. 만복도 웃었다. 세대 사이에 있는 강이 잠깐 좁아지는 것 같았다.
6.
서울, 2019년 가을.
이민준, 서른여섯.
팀장 자리가 하나 났다. 민준 위로는 차장 셋이 있었고 아래로는 삼 년 차, 이 년 차가 다섯 명 있었다. 팀장 자리는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옆에서 치고 들어온 외부 영입이었다.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혼자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샀다. 한강 벤치에 앉아서 마셨다. 강 건너 아파트들이 불을 켜고 있었다. 어느 집은 불이 꺼졌다. 그 집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민준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생각은 자꾸 직장으로 돌아갔다.
위에서는 "요즘 MZ세대 다루기 어렵지"라고 했다. 아래에서는 "저 차장님 꼰대 스타일"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민준은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조심하다 보니 어느새 아무것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는 걸 그날 처음 자각했다.
집에 오니 아내 지현이 아이를 재우고 있었다. 다섯 살짜리 딸이었다. 민준은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파이썬 강의 유튜브를 틀었다. 문과 출신이 코딩을 배운다는 게 처음엔 굴욕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그냥 생존이었다. 회사에서 데이터 분석 업무가 늘면서 엑셀로 버티던 한계가 왔다. 누군가가 치고 올라오기 전에 먼저 해야 했다.
for i in range(10):
print("Hello, World!")
화면 속 강사가 설명하는 걸 따라 치면서 민준은 생각했다. 아버지는 마흔여덟에 실직하고 신발 가게를 차렸다. 나는 서른여섯에 코딩을 배운다. 우리는 둘 다 살아남으려고 새로운 언어를 배운 것인가.
자정이 넘었다. 지현이 나왔다.
"또 공부해?"
"응."
"자야지."
"조금만 더."
지현은 물 한 컵을 갖다 놓고 들어갔다. 민준은 물을 마시며 강의를 멈추지 않았다.
7.
의성, 2022년 추석.
만복은 일흔두 살이었다. 신발 가게는 진즉에 아들 친구한테 넘기고 귀향했다. 고향집을 고쳐 순이와 텃밭을 가꾸며 살았다. 슬하에 민준 하나, 손녀 하나.
추석 연휴에 민준 가족이 내려왔다.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수박을 잘랐다. 손녀 예린이가 씨를 뱉으며 웃었다. 만복은 그 모습을 보고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이가 드니 눈물이 헤퍼졌다.
저녁에 민준이 차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 요즘 전기차 어때요?"
만복은 올 봄에 전기차로 바꿨다. 동네 어르신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처음엔 주유소를 안 간다는 게 실감이 안 났다. 이제는 충전기 앱을 능숙하게 쓴다.
"좋더라. 기름값이 없으니까. 근데 처음엔 무서웠다. 시동 소리가 없으니까 내가 제대로 켠 건지 알 수가 없었어."
민준이 웃었다.
"저도 처음 전기차 탔을 때 그랬어요."
만복이 수박 한 조각을 들며 말했다.
"나 어릴 때 소달구지가 있었다. 그 다음엔 경운기가 나왔지. 그 다음엔 버스 타고 도시 나가서 자전거 샀고, 오토바이 몰다가 차 뽑았지. 그것도 처음엔 떨렸다. 면허 따고 핸들 잡은 날, 손에 땀이 났어."
민준이 조용히 들었다.
"근데 다 배우더라. 사람이 적응을 하게 되어 있어. 니가 지금 뭘 배우든, 그게 코딩이든 뭐든, 다 된다. 시간이 문제지."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 말이 위로인지 잔소리인지 구분이 안 됐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웠다.
예린이가 뛰어와서 만복 무릎에 올라탔다.
"할아버지 차 타고 싶어."
만복이 손녀를 번쩍 들었다. 허리가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 내일 아침에 타자. 소리 없이 쓩 나간다. 무섭지도 않아."
8.
그날 밤, 민준은 마당에 혼자 나왔다. 의성 하늘에는 별이 많았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별들이었다. 그는 귀에 무선 이어폰을 꽂고 파이썬 강의를 틀었다가, 다시 뺐다.
그냥 하늘을 봤다.
아버지는 저 하늘 아래 검정고무신을 신고 모를 심었다. 나는 저 하늘 아래 노트북 앞에서 코드를 친다. 우리가 싸우는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같다. 밥. 가족. 내일.
민준은 갑자기 아버지가 처음 구두를 샀을 때가 궁금해졌다. 물어본 적이 없었다. 살면서 아버지에 대해 물어본 게 별로 없었다는 걸 그날 처음 깨달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만복이 텔레비전을 보다가 졸고 있었다. 순이는 옆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민준은 아버지 옆에 앉았다. 만복이 눈을 떴다.
"안 자고?"
"아버지, 처음 구두 샀을 때 기억해요?"
만복이 잠시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웃었다.
"기억하지. 발뒤꿈치가 까져서 밴드 붙이고 다녔다."
"비쌌어요?"
"그때 월급 반이었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복이 아들 얼굴을 봤다.
"왜, 갑자기."
"그냥요."
두 남자는 텔레비전을 봤다. 화면에서는 어떤 드라마가 흘렀다. 내용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오래간만에 나란히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순이가 뜨개질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예린이 내일 일찍 일어난다. 너희도 자라."
두 사람은 동시에 "응" 했다.
그리고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창밖에서 귀뚜라미가 울었다. 만복이 어릴 적에도 울던 소리였다. 민준이 어릴 적에도.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귀뚜라미는 울었다. 그게 이상하게 마음을 놓이게 했다.
검정고무신은 사라졌다. 전기차가 마당에 있다. 그 사이에 두 남자의 삶이 있었다. 지나온 길은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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